진천 읍내가 잘 내려다보이는 길상사를 떠나 15분만에 충청북도기념물 제77호인 이상설 생가에 12시 35분쯤 도착했다.
1904년에 급제한 다음 해에 의정부 참찬이 되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울분을 참지 못해 길에서 연설한 후 두문불출하다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장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알리고자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블라디보스독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1910년에는 한일합방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내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한국 근대수학의 개척자-이상설①] 베델 “신구학문 겸비 당대 제일 학자” 평가 [한국 근대수학의 개척자 이상설②] 130년 전 ‘수리’ 붓글씨 본 간행 [한국 근대수학의 개척자 이상설③] 1895년 성균관장 부임, 수학·과학 필수과목 지정 [한국 근대수학의 개척자 이상설④] 고종 헤이그 특사 파견 칙서 [한국 근대수학의 개척자 이상설⑤] 충북 진천에 생가 복원, ‘현대 수학 요람’ 되길 ※관심 있는 분은 인터넷에서 검색해보세요.
이상설 유허비 앞에서 안희두
고종황제의 밀서를 받고 헤이그에 갔던 세 분 중 한 사람 이준 열사는 자결하여 세계에 이름을 날렸는데 … 머리에 남아있는 전부였다
이른 아침 블라디보스독을 떠나 우수리스크를 향해 반나절을 달리면서 버려진 벌판 너머 파도로 몰려오는 고려혼, 고려혼
횃불을 감아올린 유허비 앞에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그 옛날 신학문인 영어와 러시아어도 공부하고 마지막 문과에 급제, 요직을 거쳐 정2품 의정부 참찬 을사늑약에 자결하였으나 하늘이 때가 아니라 살라 한다 간도로 망명하여 서전서숙 설립 민족혼 불어넣다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가는 도중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 비록 평화회의 입장은 거절당했지만 오히려 일본의 침탈 세계만방에 알렸다 영국과 프랑스, 미국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돌아와 가는 곳마다 독립운동 불꽃을 지폈네 민영환, 이준, 안중근 … 만나는 사람마다 젊음을 조국을 위해 등신불이 되었네
48세 일기로 세상 떠나며 조국광복 이루지 못했는데 어찌 고혼인들 돌아가랴? 몸과 유품 불태우고 바다에 뿌려 달라
수이푼 강 내려다보며 우수리스크의 개척사와 독립운동 열기 발해와 고구려의 말발굽 소리 스치는 바람결에 엿듣다 부끄러워 고개 숙이네
※ 시작 노트 : 보재(溥齋) 이상설 선생은 1870년 12월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으며, 1907년 고종 황제의 밀지(密紙)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과 함께 참석, 일본의 침략 행위를 세계에 알리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조선에서는 일본의 압력으로 밀사에 대한 궐석재판이 진행되고 이상설에게는 사형이,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1914년 대한 광복군 정부를 수립하고 정통령에 선출되었으며, 1915년 상하이 영국조계 안에 박은식(朴殷植) 등과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이상설 선생은 1917년 연해주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2001년 10월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자신의 유언에 따라 유해가 뿌려진 수이푼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상설 유허비를 세웠다. 앞뒷면에는 한글과 러시아어로 이상설 선생의 일대기가 음각되어 있다. 2007년 필자가 여름 독립 유적지를 방문하고 쓴 시이다. <안희두 제6시집>
O. 옥동방죽
진흙탕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듯 연꽃은 아주 힘든 상황에 부닥쳐있어도 항상 맑은 본성을 간직하고 맑고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나 세상을 정화한다. 연꽃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힘든 병마 이겨낼 용기를 달라고 잠시 기도했다.
P. 점심
생거(生居) 진천(鎭川)은 그만큼 산 좋고 물 맑아 살기 좋다는 거겠죠. 뜻밖에 이상설 선생님을 만나 신의 한 수인 산수(算數)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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