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말 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 고 김용민(1943-2021) 선생의 삶과 예술Ⅱ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말 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 고 김용민(1943-2021) 선생의 삶과 예술Ⅱ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1.12.08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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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지난 호에 이어서)

김용민의 오브제 작품 중에서 대표작에 해당하는 울타리는 일상에서 흔히 보는 광경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나는구례에 있는 화엄사 대웅전 기둥을 보고 김용민의 <울타리 > 작품을 떠올린 적이 있는데, 굵은 기둥을 떠받친 주춧돌의 높이가 서로 달랐던 것이다. 김용민의 울타리 역시 석가래로 된 사방 키 높이는 똑같았지만 아래의 고임돌 높이는 기둥의 키에 따라 서로 달랐다.

이처럼 김용민은 일찍이 전통의 현대화에 앞장을 섰다. 그는 이 화두에 관념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이벤트와 오브제, 설치를 통해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내친 김에 김용민의 대표적인 개념미술 작품 하나만 더 소개하기로 하자. 1976년 [서울현대미술제] 출품작인 이 작품을 사실 나는 전시가 되기도 전에 만난 적이 있다. 방학을 맞아 성환 고향집에 왔다가 서울 올라가는 길에 우연히 평택역 대합실 의자에 앉아있는 김용민 선생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삼각캡을 쓰고 말쑥한 점퍼 차림이었는데, 옆에 끼고 있는 가방 한쪽 끝에 돌돌 말은 종이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내가 반갑게 인사를 했는데 그는 내가 누군지 모르는 눈치였다. 몇 마디를 건네자 이내 알아보고 반갑게 대했다. 어디 가시냐고 물으니 서울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러 간다고 했다. 그 작품이 바로 문제의 '컴퍼스' 작품이었다.

나는 이 작품을 며칠 뒤에 [서울현대미술제]가 열리고 있는 듹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봤다. 그것은 연필을 중심으로 컴퍼스를 돌리니까 원의 중심 부분에 연필자국이 무수히 나면서 반대로 연필이 지나가야 할 자리인 종이 위에는 컴퍼스의 뾰족한 바늘에 긁힌 자국이 낭자한, 전도된 형국을 보여주고 있었다. 컴퍼스를 반복해서 돌릴 때 연필이 이리저리 미끌어지면서 어질러진 자태와, 반대로 날카로운 바늘이 부드러운 종이 표면을 이리저리 할퀴고 지나간 자취는 나중에 찾아 올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는 것이었음을 아마도 그때는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성능경의 증언에 의하면, 한 때 김용민은 ''ㅇㅇ가 내 아이디어를 훔쳐갔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그것이 환영이었는지 망상이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오직 신만이 알 뿐이다. 그가 정신병원에 갇혀 무려 18 년간이나 생을 유지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는 아는 바가 없다.

90년대 중반에 김용민 선생은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한 적이 있다. 예의 과묵하고 어눌한 말투로 자신의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주저주저하며 믈었다. 그리고는 몇 마디 나눈 게 다였으며, 나는 다시 분주한 일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광주 아시아 문화전당이 의뢰한 원로행위예술가 구술채록사업의 책임연구원으로 위촉된 2014년 가을 무렵이었다. 세월은 마지막 통화를 한 시점에서 무려 20년이나 지나 있었다. 회한과 후회가 가슴을 쳤다. 그동안 김용민이란 존재를 깨끗이 잊고 있었던 것이다. 도저히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인터뷰 명단에 포함시키고 소재파악에 나섰다. 충청남도 천안 태생인 나는 시골의 사정을 잘 아는 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기억 속에 있는 김용민 선생의 집 주소 하나에 의지하여 이아영, 김수정 등 두 큐레이터를 비롯한 연구, 촬영팀과 함께 논산으로 향했다. 충남 논산시 연산읍 연산리. 예상대로 집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동안 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군'이 '시'로, '면'이 '읍'으로 변해 있었다.

연구팀이 노력한 끝에 마침내 서천시의 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무려 40년만의 해후였고, 그 뒤 7년만에 그의 부음을 들었다. 성능경 선생이 영정 앞에서 고인의 대표작 <걸레짜기>를 재연했으며, 필자와 시인인 고인의 형, 그리고 수녀가 된 고인의 여동생이 지켜봤다. 참으로 쓸쓸하기 그지없는 장례였다. 고 김용민은 대구현대미술제를 비롯하여 서울현대미술제, ST전, 에꼴드서울전. 상파울루비엔날레 등 70년대에서 80년대 초반까지 개념미술적인 작품과 이벤트에 주력했으며, 80년대 중반이후부터 90년대 중반까지는 꽃을 소재로 색과 평면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한 일련의 실험작업을 거듭하다가 정신병원에 수용돼 끝내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