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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의 성도’ 를 탄생시킨 ‘말라리아와 류마티스’ 화가 뒤러(Albrecht Durer)

  • 입력 2021.12.08 12:10
  • 기자명 문국진(의학한림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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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네 명의 성도’ (1526) 뮌헨, 알데 피나코텍
‘네 명의 성도’ (1526) 뮌헨, 알데 피나코텍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뒤러의 독일인 아버지는 금세공인 이였으며 어머니는 뉘른베르크 출신의 규수이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 2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공방에서 제도공으로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뒤러는 독일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이며 판화가로서 수많은 그의 작품에는 제단화와 종교화, 초상화와 자화상 그리고 동판화 등이 있다. 독일 르네상스는 뒤러를 시작으로 발단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전 미술이 부여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인체의 표현에도 관심을 쏟은 뒤러는 무엇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 인체의 비율구조에 대해 연구 하였으며, 그는 인체의 올바른 균형과 조화를 찾기 위해 인체를 과도하게 길게 또는 넓게 그려 인체를 왜곡되게 표현하기도 해보았으며 성경의 이야기를 더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어떤 예술가보다도 끈기 있고 충실하게 자연을 묘사하였다.

뒤러는 직접 회화를 그리기도 했지만 당대의 미술품 제작관습에 따라 공방작업을 통하여 수많은 목판화, 동판화 작품을 남겼고, 판화의 밑그림이 되는 흑백소묘도 다수 남겼다.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완성자라는 평가에 걸맞는 미술이론 서적도 많이 남긴 유능한 미술이론가이기도 해, 유채화 약 100점, 목판화 350점, 동판화 100점, 소묘 900점 가량을 남겼다.

뒤러의 초기작품은 중세적 기독교 신앙을 배경과 소재로 하여 제작하였다. 그래서 뒤러의 초기작품은 그리스도의 수난, 만찬 등의 소재, 중세미신적인 소재가 많다. 하지만 후기로 가면서 당대 종교개혁의 기수 루터에 의한 사상적 영향으로 미술 소재적인 측면에서 중세를 탈피하는 듯한 변화가 생기고, 기법적인 측면에서도 원근법과 인체 비율법을 익혀서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는 한편, 르네상스기로 들어서면서 많은 미술가처럼 뒤러도 인체비율과 원근을 측량하는 도구들을 사용하였고, 당대의 기하학과 수학에도 능통하여 원근법과 인체비율에 관한 미술이론서적도 남겼다.

뒤러시대의 미술계는 당시의 문화적, 사회적인 영향 아래 놓여있었다. 따라서 중세와 르네상스기 유럽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뒤러의 작품도 역시 영향받았다. 소재와 주제적인 면에서 뒤러 작품의 70%는 기독교적인 것이고, 그 나머지는 르네상스기에 부흥한 그리스, 로마 고전적 소재들이다. 가령 헤라클레스나 포세이돈 같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을 소재로 채택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과 같은 고대의 사상가들에게서 영향받은 작품들도 다수 있다.

말년에 들어 뒤러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자 그는 몇몇 유명인사의 초상화를 그렸고 중요한 인물들의 초상을 동판화와 목판화로 여러 점 제작하였으며 이론적이며 과학적인 저술과 삽화 그리기에 여생을 바쳤는데, 그의 가장 뛰어난 회화작품 중 하나인 ‘네 명의 성도(성 요한, 성 베드로, 성 바울로, 성 마가)’는 1526년에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뒤러는 화가로서 최고 절정의 수준에 도달했다. 그는 자신의 솜씨에 언제나 만족했으나 이로 말미암아 단순하면서도 표현이 매우 풍부한 폭넓은 그림을 그리려는 이상이 위축되지 않았다.

‘네 명의 성도’와 관련해서 이 그림이 단순한 종교적인 의미를 내포한 그림이라기보다도 더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것은 당시의 철학과 의학의 최첨단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양에서는 고대로부터 중세를 통해 세계는 ‘공기, 물, 불, 흙’의 4대 원소로 이루어진다는 개념이 전해지고 있었다. 희랍의 대의학자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의 몸은 이 4대 원소가 각각 혈액, 점액, 황담즙(黃膽汁), 흑담즙의 4종류의 체액이 되고 이 체액 중 어느 체액이 우세하게 몸을 구성하는가에 따라 그 체질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이론을 수립하였다. 이 4체액의 이론의 개념이 로마시대의 갈레노스에 의해 정설화되었고 중세를 거치고 르네상스를 통해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근대적인 생리학, 병리학이 탄생되기까지 유럽의 의학을 지배하여왔다.

뒤러의 말년의 작품인 ‘네 명의 성도’(1526)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성 요한, 성 베드로, 성 바울로와 성 마가를 그린 것인데 이 네 명의 성도로 하여금 네 체질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의 좌측에서부터 다혈질(多血質 sanguine)의 성 요한은 젊고 혈색이 좋으며 붉은 외투를 두르고 있으며, 그 옆의 대머리의 좀 둔해 보이는 초로의 남성은 점액질(粘液質 phlegmatic)인 성 베드로이다. 사나운 눈초리로 수염이 무성한 우울질(憂鬱質 melancholic)의 성 바울로는 화 잘 내는 중년 남성으로 표현되었으며, 그리고 담즙질(膽汁質 choleric)의 성 마가는 엷은 푸른색의 옷을 휘감고 있다. 성 요한과 성 마가는 각각 복음서를 들고 있으며 성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그리고 성 바우로는 순교의 검을 들고 있어 일반 국민이 자기의 체질을 인식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네 체액 설은 19세기 이후에도 살아남아 골상학, 두개학(頭蓋學) 그리고 20세기에는 나치 독일의 우생학과 연결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류는 지금도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의 영역에서는 사용되고 있으며 다혈질은 순환기질(循環氣質)로, 담즙질은 간질기질(癎疾氣質)로, 우울질은 분열기질(分裂氣質)에 대응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뒤러는 ‘네 명의 성도’를 그린 만년에는 그 흥미의 중심이 인간의 외면을 통하여 이해될 수 있는 내면세계로 이향되어 기술적으로도 전성기에 달했을 때 이었다.

그의 다른 작품으로 병의 증상을 정확하게 표현한 그림으로는 ‘기도하는 손’ (1508), ‘아픈 남자; 비종(脾腫)’ (1512)을 들 수 있다.

‘기도하는 손’ (1508) 빈, 아르베티나 소묘 판화관
‘기도하는 손’ (1508) 빈, 아르베티나 소묘 판화관
‘아픈 남자; 비종(脾腫)’ (1512) 브레멘, 공예박물관
‘아픈 남자; 비종(脾腫)’ (1512) 브레멘, 공예박물관

‘기도하는 손’은 자기의 손가락이 류마티스로 인해 변형된 것을 표현한 것이며 ‘아픈 남자’의 비종은 비장이 커졌다는 의학용어인데 그림에서는 반나체의 남자가 자기의 왼쪽 기늑부를 손가락으로 가르키고 있다. 이것은 뒤러가 지방의 의사에게 편지를 내면서 ‘이 부위가 아프다’는 자기의 아픈 곳을 그림으로 그려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이론도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비장은 흑담즙을 만드는 메란코리의 장기로 알려지고 있을 때임으로 자타가 공히 우울질로 알려졌던 뒤러의 자화상으로 상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뒤러가 말라리아를 앓다가 사망하였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가 ‘아픈 남자; 비종’을 그린 1512년 즉 사망하기 16년 전에는 벌써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있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비장이 종대 되는 비종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고 또 손에도 류마티스로 인해 손가락이 변형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494년 이래 뒤러는 이탈리아를 때때로 방문하건 하였는데 이 그림을 그리기 전해인 1511년에 뒤러는 베네치아와 밀라노를 방문한 기록이 있다. 16세기 당시 한랭한 기후의 독일에는 말라리아는 거의 발생되지 않았으나, 고온 다습한 이탈리아에는 말라리아가 극성을 부리고 있을 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탈리아를 여행 중에 모기에 물린 것으로 추측된다. 또 당시 뒤러를 진찰한 독일 의사들은 말라리아 환자를 치료한 경험이 없었고 또 당시는 말라리아에 특효약인 키니네도 나와 있지 않았던 때이다. 즉 키니네가 유럽에 도입된 것은 17세기 초이고 보면 뒤러는 말라리아로 고통받으며 자기의 아픈 곳을 그림으로 표시하였는데 그것이 말라리아로 인한 비종인 것은 아무도 몰랐던 것을 의미 한다.

뒤러는 1528년에 죽어 뉘른베르크에 있는 성 요한 교회의 묘지에 묻혔다. 그가 독일의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가 중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그를 따르는 수많은 제자와 모방자들로도 명백하게 증명된다.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조차 뒤러의 판화 작품들을 자주 모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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