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근의 지리산 문화대간(107)

남원 고을 깊은 산속에 장터가 있었다. 1600년대 고지도에는 남원부 48방 중 아산방에 장시가 보이는데 아산 장터가 그곳이다. 사람들이 아사리 장터라고도 불렀다는 그곳은 지금 덧씌워진 세월의 갑옷 속에 들어 있다.

어제 그곳을 답사했다. '아사리 장판'이었다는 '아산방 장터'는 질서가 없이 어지러운 곳이라는 용어의 뜻처럼 장날 나온 어떤 산물을 서로 차지 하려고 장날 아사리 판이 이루어 진다는 곳이라고 한다. 그 물건은 무엇이었을까?

첩첩산중 그 고을 사람들이 생필품을 들고 나와 사고 팔던 그곳에 다른 지역 사람들까지도 탐내던 물건은 그 장터에 수많은 사람들을 부르는 유인체가 되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장시가 번창되었을 것이니 당시 고지도에 중요 지명으로 기록 되었으리라. 며칠 전 그곳을 답사하기 전에 몇 가지 자료를 들여다 보았다.

남원의 역사서인 용성지에는 옛날 사기점이 남원부 아산방 옹역에 있었는데 흉년이 들어 망하더니 약간 명만이 그 일을 어렵게 유지 하다가 한 때 모두 도주해 버려 부사 여익제가 관리 소홀로 상사로부터 책임을 물어 구속되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그곳의 실체를 찾아 조사에 나섰다. 남원의 그릇문화는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 갔다는 도공의 이야기로 큰 세상을 향했으나 그 인문적 항토적 실체가 은둔중이고 장소가 특정되지 못하고 있다.

당시 왜군이 선호한 그릇이 다기류었다고 하니 찻사발이나 찻잔을 굽던 가마터의 흔적은 당시 끌려간 남원 도공의 역사 유전자를 꺼낼 수 있는 마중물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그런 곳을 찾아 나섰고 아산방 옹역이 그 대상이었다. 지명이 바뀌었고 구전마져 오리무중이니 한강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일 것이라는 생각을 잘라내는 정보가 수집 되었고 아사리 장터의 물건이 찻사발 찻잣 같은 도자기 그릇이었다는 것과 그것의 주 소비자가 양반들과 스님이었다는 것에 더하여 그 그릇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이는 가마터가 인근에 있다고 하여 발품을 내기 시작했다.

용성지의 기록처럼 배고픈 도공들은 관요일지라도 도망하여 제살길을 찾아 나섰고 그곳이 산중일지라도 자신들의 손재주 기술로 그릇을 만들어 낼만한 곳이면 터를 잡아 가마를 세웠을 것이며 그들의 생산품이 근처 아산방 장터에 나왔을 것이니 당시 절대적 귀중품으로 선호되었던 그 제품들은 인근 고을사람들의 귀한 선호상품으로 소문이 나서 그것을 사러 몰려드는 사람들로 아사리 장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신분으로 핍박 받으며 그릇 생산을 강요 당하던 도공들은 깊은 산중에서 자신들의 영혼을 담은 그릇들이 장날마다 세상을 향하는 것에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오늘이 오늘이소서

매일이 오늘이소서

저물지도 새지도 말으시고

날이 새려거든

언제나 오늘 같은 날이 되게 하소서.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때 남원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불렀을 오늘이소서는 그시절 조국 조선땅 남원부의 아산방 아사리 장터 옹역소 시절을 그리워 하는 피눈물 나는 망향가였으리라. (중략) 그곳 몇 군데 가마터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도자 파편이 당시의 시간을 붙들고 있었다. 

왜 한 곳의 가마터로 보이는 곳에서는 찻사발과 찻잔의 조각들만 수도 없이 보이는 걸까? 거기에 더하여 50년 전 일본 사람들이 이곳 가마터를 조사 왔었다는 현지 어르신의 이야기와 그곳 가마터를 밭으로 개간할 때 돌판 수십개가 타원형으로 있어 가마 지붕을 돌로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 수십년 전에 어떤 사람들이 그 밭을 임대하여 경작은 하지 않고 땅을 파서 도자기 발굴을 했었다는 이야기, 마을의 탄생이 임진왜란 때부터라는 이야기, 냇가도 없는데 가마터로 보이는 인근 땅을 파면 가는 모래가 엄청 많이 나온다는 이야기에 더하여 원터, 장자골, 점골 같은 지금의 구전 지명은 그 시절 도공들의 유전자 공동체의 텍스트가 아닐까 싶다.

문화는 고을 공동체를 단단히 하게 하는 마중물이다. 그래서 백성들이 백성들의 축제를 내면 백년대계의 기둥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숨어 지내는 백성들의 이야기는 잠시 휴식일 뿐이다.

/글·사진: 김용근(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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