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름길 법문] ‘공적영지’가 나타나야 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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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 법문] ‘공적영지’가 나타나야 선이다
  • 라도현
  • 승인 2022.05.26 15:51
  • 호수 1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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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 법문 16
라도현<br>화정교당 교도<br>
라도현<br>화정교당 교도<br>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선종(禪宗)의 많은 조사가 선(禪)에 대한 천만 방편과 천만 문로를 열어 놓았으나, 한 말로 통합하여 말하자면 망념을 쉬고 진성을 길러서 오직 공적영지(空寂靈知)가 앞에 나타나게 하자는 것이 선이니, 그러므로 “적적(寂寂)한 가운데 성성(惺惺)함은 옳고 적적한 가운데 무기(無記)는 그르며, 또는 성성한 가운데 적적함은 옳고 성성한 가운데 망상은 그르다.”하는 말씀이 선의 강령이 되나니라.」 (대종경 수행품 12장)

선(禪)의 어원은 인도불교의 ‘디야나’ 또는 ‘쟈나’이며, 이것이 중국으로 건너와 선나(禪那)가 되었다가 선(禪)으로 줄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의미가 더하여져 선정(禪定)으로도 불리게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선은 마음의 자유, 해탈을 얻는 수행법입니다. 이를 위해서 선은 단순히 고요함[定]만으로는 부족하고 지혜[慧]가 함께해야 하는데, 이를 가리켜서 ‘선정과 지혜를 함께 든다[定慧等持]’고 하고, 이 선정 속의 지혜를 공적영지라고 합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선이란 ‘오직 공적영지가 앞에 나타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공적영지가 없다면 결코 선이라 할 수가 없는데, 공적영지란 앞서 말한 정혜등지라고 하는 ‘텅 비고 밝은’ 자성의 지혜광명입니다. 이 공적영지는 우리 마음이 적적성성(성성적적)한 경지가 되면 저절로 나투는 것으로, 여기서 적적(寂寂)은 자성 정(定)을 뜻하고, 성성(惺惺)은 자성 혜(慧)가 발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 적적과 성성, 즉 자성 정혜는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없어서, 결코 둘이 아닙니다. 만약 적적하되 성성하지 않다면 이 적적은 참으로 적적함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성성하다고 해도 적적하지 않다면 이 성성 또한 참다운 성성함이 아닙니다. 때문에 적적과 성성이 함께하지 않으면 이것은 선이 아니라는 것이며, 무기 또는 망념이라고 합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선의 강령이라고 하신 적적성성(성성적적)은 말로는 평이(平易)하지만 실제 수행도 그렇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사실 많은 선 수행자들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망념)과 성품에서 발하는 ‘지혜(공적영지)’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앉아서 어느 순간 ‘일체 생각이 끊어져 아무런 지각이 없는 상태’를 선의 적적(寂寂)으로 알고 있으며, 마음이 ‘멍하거나 졸린 느낌이 없이 깨어있는 상태’를 선의 성성(惺惺)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적영지란 범부중생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특별한 지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적적성성은 그대로가 공적영지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적적함 자체가 곧 공적(空寂)이요, 성성함 자체가 곧 영지(靈知)입니다. 더 세밀히 말하면, ‘적적하다’고 하지만 그 가운데는 적적함[寂相]이라는 게 없고, ‘성성하다’고 하나 거기엔 성성한 실체[惺相]가 없습니다. 텅 비어 두렷한 영지(靈知)는 아무데도 머무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적적성성’과 ‘공적영지’는 서로 같은 뜻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주한 바 없는 마음’입니다. 선을 닦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러한 것을 알고 수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랜 세월 동안 별 소득도 없이 앉아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5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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