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빛을 닮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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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빛을 닮은 사람
  • 유성신
  • 승인 2022.01.25 13:38
  • 호수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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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에서 온 편지 10
유성신<br>서울교구 오덕훈련원 원장<br>
유성신
서울교구 오덕훈련원 원장

연초에 어느 가정을 방문했다가 돌로 조각한 상당히 무게가 나가는 동자승을 선물 받아 우연히 내 처소로 옮겨오게 됐다. 얼굴은 동글동글, 눈·귀·코·입은 오목조목, 시선은 안으로 향하고, 꼭 다문 입은 묵상하는 듯한 선심(禪心)의 기운이 얼굴에 꽉 차 있다. 예술의 극치를 이뤄 심불(心佛) 일원상을 닮은 귀인처럼 볼수록 마음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런 인연을 만난 것이 왠지 올해 운세가 좋을 것만 같다. 물건이나 사람이나 우리가 만나는 대상이 우연인 듯하나 우연도 필연인 것이다. 겨자씨만한 조그마한 씨앗 하나가 떨어져 싹이 트는 것도 그럴만한 충분한 조건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어느 날 티베트 여행을 하다가 3천 미터 고산에 있는 백두산 버금가는 호수 앞에서 여행자에게 모델이 된 일가족 가운데 여자 꼬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얼굴에는 땟국물이 줄줄 흐르고 뒤엉킨 머리는 한다발이 돼 칙칙한 야생마 같았지만 그 아이에게서 뿜어 나오는 순수와 진실의 빛을 잊을 수가 없다. 마치 우리 조상의 핏줄을 이은듯한 그들이 이 지구상에 살고 있다는 것에 섬뜩한 전율이 일었다. 그 때문인지 몽골인이 사는 히말라야 자락과 자연스럽게 인연이 돼 몇 해 동안 고향 마을처럼 편안하게 머물렀다. 그곳은 하늘에서 굵은 별빛이 쏟아지고, 보름 무렵이면 하얀 설산에 휘영청 떠오른 달이 금세라도 산자락을 타고 내가 사는 마을에 걸어 내려오기라도 할 기세였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숭고한 배경 속에서는 인간의 마음도 자연의 빛에 물들어 꾸밈없이 백마를 탄 초인으로 평화를 노래하며 살아갈 수 있는 진실의 여백을 지니게 된다. 풍요롭고 편리한 물질문명을 좇아 사는 우리는 점점 자연과 멀어지고, 사는 것은 더 숨 가쁘고 풍요 속에서도 빈곤과 결핍이 일어나며, 인간관계는 단절되고 고립되어 가고 있다.

물질이 귀했던 어린 시절, 명절에 운동화 한 켤레 양말 한 켤레 빨간 내의 한 벌만 사줘도 하늘을 날 듯이 기뻐했던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많은 소유 때문에 진정 귀한 것의 가치를 몽땅 잃어버렸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물질이나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하늘빛을 닮은 사람의 마음이다.

우리 조상의 어머니는 새해 설 명절이 다가오면 집안 구석구석을 대청소하고 이불 홑청에 풀을 먹여 이불깃 바스락거리는 청량함으로 손님과 가족을 맞이했다. 그 이불에 들어가 잠을 청하고 정성껏 만든 음식을 먹고 자라난 세대는 어머니의 정과 기운을 온통 받고 성장했다. 명절에 가족이 머리 둘러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인간의 가장 따뜻한 손길과 정을 나눌 수 있는 최고의 기회다. 아무런 조건 없이 손수 지은 영혼이 담긴 따뜻한 밥 한 그릇을 기쁘게 나눌 줄 아는 넉넉한 마음에서 사람의 참다운 향기로움이 있다. 내 주변에 모인 인연을 귀하게 여기며 분별심 없이 나누는 청정한 보시야말로 복록의 문이 열리는 최대의 불공인 것이다. 시가와 친가의 국경을 넘어 한 대를 잇게 하는 아이들의 눈망울에서 눈물이 똑똑 떨어지다가 채 마르기도 전에 까르르 웃는 천진무구한 성품을 보라.

새해 이 겨울! 가을 하늘보다 더 높고 청량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해맑은 어린아이를 만나고, 너른 대지와 같은 어머니의 포근한 품을 느껴 보자. 이런 하늘빛을 닮은 동자승을 만난 것이 나에게는 행운을 여는 한해인 듯하다.

1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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