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정순덕 전 의원(4선), 김동욱 전 의원(4선), 이군현 전 의원(4선), 김명주 전 의원(1선)의 모습. (사진/인터넷 캡쳐)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정순덕 전 의원(4선), 김동욱 전 의원(4선), 이군현 전 의원(4선), 김명주 전 의원(1선)의 모습. (사진/인터넷 캡쳐) 

 

수구지심(首丘之心)이라고 했다. ‘여우는 죽을 때 태어난 곳으로 머리를 향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로, 객지를 떠돌아 다녀도 죽을 때가 되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인간의 마음을 비유하는 데 쓰는 사자성어다. 하지만 이 말이 국회의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 같다. 고향주민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 덕분에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고서, 물러난 뒤에는 귀향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현역 국회의원 시절 그렇게나 고향발전을 외쳤던 만큼 충분히 발전을 이뤘으니 고향에서 내가 할 일은 더 이상 없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오히려 외쳤던 만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주민들에게 미안해서일까? 역대 통영 출신 국회의원들이 퇴임한 이후의 모습을 단편적으로나마 소개한다.

부자가 같은 운명, 당선 후 해산

이를 위해서는 먼저 김기섭(1916~1979.3.14.) 전 의원을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수차례 선거에 출마하며 많은 재산까지 탕진했던 김기섭 전 의원(당시 신민당)19718대 총선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친구인 김종길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당선배경에는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지역민들의 반감도 있었지만, 김기섭 전 의원에 대한 동정표도 한몫했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다.

하지만 김기섭 의원의 의정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듬해인 197210월 대통령 특별선언을 통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뒤인 1027일 비상국무회의에서 유신헌법을 가결하며 종신독재의 발판을 마련했다.

김기섭 전 의원, 서울의 봄 못 봐

해를 넘겨 1973227일 제9대 총선은 충무시·통영군·고성군·거제군을 하나의 선거구로 해서 6년 임기 국회의원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로 치러졌다. 김기섭 전 의원도 출마했지만 민주공화당 최재구·김주인 후보가 당선되고, 그는 3등으로 낙선했다. 6년 뒤 1978121210대 총선 역시 중선거구제로 치러졌는데, 이 선거에서는 여당인 민주공화당 최재구 후보와 부친 대신 출마한 신민당 김동욱 전 의원이 당선됐다. 하지만 김동욱 전 의원 역시 이듬해 터진 10·26 대통령 시해사건과 12·12 신군부 쿠데타로 1년여의 짧은 의정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초대 민선 충무시장을 역임했고, 대한어항공업협회이사장과 충무상공회의소회장까지 지낸 김기섭 전 의원은 평온하게 국회의원직을 마감했더라면 아마도 고향에서 만년을 보냈을 것이다. 197931463세를 일기로 사망한 김기섭 전 의원은 아들의 의정활동이 그렇게 짧게 끝날 줄은 결코 알지 못했다.

정순덕 전 의원, 내리 4선 후 출향

정순덕(1935.11.5~) 전 의원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뒤 4공화국에서 11대 대통령, 5공화국에서 12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그의 최측근 중 하나로 198111대 국회 전국구 의원, 198512대 국회 지역구의원, 대통령 직선제의 제6공화국 첫 총선인 198813대 국회에서 역시 충무·통영·고성 지역구의원, 199214대 국회 지역구의원 등 내리 4번 당선됐다. 정순덕 의원은 1990년 당시 여당인 민자당 사무총장까지 역임했다.

전국구를 빼더라도 3번이나 내리 당선시켰지만 퇴임 후 정순덕 전 의원은 고향에 정착하지 않았다. 물론 4선 국회의원의 관록에 걸맞게 어울리는 사람들이 대부분 서울이나 수도권에 있었을 테니 그럴 만도 하다. 나이가 들어 은퇴하고도 타향에 정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므로, 굳이 꼬투리 잡을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장삼이사(張三李四)가 아니잖은가? 고향민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화려한 중앙 정치무대에서 20년 가까이 빛나지 않았는가? 그가 터전을 잡은 곳이 중국이라는 설도 있고, 미국 하와이라는 설이 분분하다. 다만 그가 현재 거주하는 곳은 서울 강남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동욱, 역시 4선 퇴임후 고향 떠나

김동욱(1934.1.4~) 전 의원은 부친 김기섭 전 의원이 세상을 떠나기 전 해인 197810대 국회에 야당인 신민당 의원으로 첫 등원했다. 197910·26사건으로 피어오른 이른바 서울의 봄기운은 그에게 어느 때보다 따뜻했을 것이다. 박정희 철권통치가 종식되면서 쏟아지는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신민당의 든든한 지지로 이어질 것이 명약관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으로 그의 꿈뿐 아니라 국민들의 민주화 꿈까지 짓밟혔다.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주요정치인들이 가택 연금됐을 때 그 역시 정치활동이 금지됐고, 198111대 총선에는 그의 동생인 김관욱이 대신 출마해 14972(9.33%)를 획득하며 4위를 기록했다. 그가 다시 국회에 등장한 것은 198512대 국회에서 통일민주당 전국구의원으로서였다.

1990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자신이 이끌던 통일민주당, 김종필 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이 ‘3당 합당(3당 야합)’하며, 민자당(민주자유당)을 창당하자 그를 따라간 뒤 199615대 여당 신한국당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200016대에는 한나라당 소속으로 또다시 당선됐다.

그는 이후 한나라당 경남지부위원장, 국회 재경위원장, 대한민국헌정회 부회장, ·필리핀의원친선협회장, ·태국의원친선협회장 등을 역임하며 정치인생 전성기를 보냈다. 하지만 역시 퇴임 후 정착한 곳은 고향이 아니었다. 현재 김동욱 전 의원은 경기도 용인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젊은 김명주, 암으로 유명 달리

김동욱 전 의원의 뒤를 이은 사람은 30대의 젊은 기수 김명주(1967.3.7~2015.3.4) 전 의원이었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사법연수원 36기인 그는 창원지방법원 판사를 퇴임한 뒤 2002년 경남도의원을 거쳐 2004년 한나라당 소속으로 17대 국회에 입성했다.

그는 200818대 총선에서 MB계였던 이군현 전 의원이 전략 공천되자 한나라당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약14000표 차이로 낙선했다. 이후 변호사를 하며 재기를 노렸지만 2013년 담도암 판정을 받은 2년 뒤 48세의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김명주 전 의원은 판사 퇴임 후나 낙선 후 변호사업을 계속했던 점을 미루어 보면 아마 정치은퇴 이후에도 고향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은 정치인으로 볼 수 있다.

무투표 당선 이군현, 역시 서울로

참여정부 시절 야당인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17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군현 전 의원은 200818대 총선에서 고향인 통영으로 전략공천 받아 출마했고, 그 여파로 김명주 전 의원은 탈당하게 된다. 이군현 전 의원은 18대 당선 뒤 고향에 아파트를 구해 실제로 거주했었다. 물론 의정활동이나 대외활동이 주로 수도권에서 있다 보니 통영의 아파트는 주말이나 특별한 행사가 있거나 지역구를 방문할 때나 이용했다.

이군현 전 의원은 201219, 2016년 제20대 국회까지 새누리당 소속으로 내리 3선을 했는데, 2016년 총선에서는 무려 전국유일의 무투표 당선이라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당선 이후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기소된 이군현 전 의원은 결국 20181227일 대법원 확정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군현 전 의원은 의원직 상실 이후 통영 아파트도 처분하고, 고향을 떠나 현재는 서울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민들은 표를 구할 때만 고향사람인 척하기보다 퇴임 후에도 여전히 고향에 머물면서 이웃들과 정담을 나누고, 고민을 들어주는 전직 국회의원을 원하지 않을까? 퇴임 후에 자신의 정치역정을 회상하며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성과를 냈는지 자신의 경험담을 기록으로 남겨 후배들이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도와주는 큰 어른으로 우리 이웃에 있어주면 안 되는 것일까? 특정사안을 놓고 여론이 갈라져 있을 때 올바른 길을 잡아주는 지역의 큰 어른을 우리는 가질 수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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