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전쟁] ②세계는 '승자없는 전쟁' 중
[반도체전쟁] ②세계는 '승자없는 전쟁' 중
  • 하영건 기자
  • 승인 2023.02.04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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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비즈트리뷴

'미래의 쌀' 반도체를 둘러싼 경쟁 구도는 기업 VS 기업을 넘어 국가 VS 국가의 양상을 띠고 있다. '반도체 키우기'는 세계 각국이 지니고 있는 수많은 과제들 가운데 맨 앞에 자리하게 됐고, 반도체 패권을 쥐는 나라가 곧 세계경제의 패권을 쥐는 분위기가 됐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말했던 것처럼 "반도체 산업 육성은 단순한 기술 경쟁이 아닌 주권에 관한 문제"가 된 것이다.

스마트폰, 전기차를 비롯해 반도체를 이용한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신제품들은 앞으로 계속 생산될 것이다. 반도체를 대체할만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신기술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반도체는 그야말로 '미래의 쌀'로서 온 산업계를 장악하게 될 것이다.

약 3년 간의 팬데믹이 사실상 종식되며 전 세계가 새로운 마음으로 기지개를 켜는 2023년, 가장 '핫'한 반도체산업에서 지금 가장 '핫'한 경쟁 구도를 알아본다.

■삼성 vs TSMC, 아시아의 두마리 용

삼성은 지난 7월 세계 최초로 3나노 시스템 반도체 양산에 성공하며 시스템 반도체 경쟁에서 크게 한 발짝 나아갔다. 

3나노 공정은 현존하는 반도체 제조 공정 가운데 가장 앞선 기술이다. 반도체 칩의 회로 선폭을 나노미터 단위로 분류해, 통상 5나노 이하의 기술을 '초미세 공정'이라고 일컫는데 삼성이 세계 최초로 양산에 성공한 '3나노'는 회로의 선폭이 3나노에 달하는 것이다. 나노의 크기를 줄이면 줄일 수록 더 많은 웨이퍼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반도체 생산 업체들이 이 선폭을 줄이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3나노 파운드리 양산에 참여한 파운드리사업부, 반도체연구소, 글로벌 제조&인프라 총괄 주역들이 손가락으로 3을 가리키며 3나노 파운드리 양산을 축하하고 있다. (사진=삼성뉴스룸)

지난 7월 삼성이 3나노 양산에 성공하며 'TSMC를 따라잡았다'는 제목의 기사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그러나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의 위상은 여전히 견고하며, 파운드리 시장만 놓고 보았을 때는 삼성이 TSMC를 '따라잡았다'고 말하기는 한참이나 이르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022년 3분기 기준 TSMC의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56.1%였다. 반면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15.5%를 기록했다. TSMC는 파운드리 성과에 힘입어 작년 3분기 글로벌 반도체 시장 매출 1위를 달성했다. 이는 4분기에도 마찬가지로, 지난해4분기 TSMC는 영업익 3250억 대만달러를 기록하며 전년 동기 대비 78% 증가라는 어마어마한 수치를 내놨다. 반도체 시장 매출 1위도 여전히 TSMC의 몫이다.

'그래도 3나노 양산은 삼성전자뿐', '세계 최고 기술은 여전히 삼성전자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무색하게 작년 말에는 TSMC도 3나노 양산에 들어가며 삼성전자의 등을 바짝 쫓았다. 

당시 대만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TSMC는 대만 국내에 위치한 반도체 생산공장에서 3나노 제품 양산에 들어간다고 밝혔고, 2023년부터는 N3E 칩 제조 기술을 사용해 대량생산에 나서면서 보다 효과적인 제품을 생산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TSMC는 3나노 양산 선언에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3나노보다 첨단 기술인 2나노 제품을 개발하고 있으며 오는 2025년 양산을 목표로 새 공장 건설에 나서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TSMC의 3나노 양산 개시와 2나노 양산 선언으로 인해 연초부터 삼성과 TSMC를 대립구도로 그리는 기사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동안 삼성과 인텔이 반도체 시장 1위 자리를 두고 엎치락뒤치락 하던 판에 TSMC라는 새로운 기업이 끼어들면서 완전히 새로운 판세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대만 TSMC 공장. (사진=블룸버그)

■'온 우주'가 돕는 TSMC, 대만 정부와 한몸으로 움직인다

한국의 주력 품목인 메모리 반도체가 수요 부진으로 헤매는 동안, 세계 반도체 시장의 총아로 떠오른 것이 바로 시스템 반도체다. 쓰임새가 매우 다양한 시스템 반도체는 설계와 생산이 분리된 구조로 생산되며, 이에 따라 설계를 담당하는 팹리스와 위탁생산을 담당하는 파운드리가 구분되었다. TSMC는 파운드리를 전문으로 하는 기업이다.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사에서 반도체 사업부 부사장을 지낸 경력이 있는 모리스 창 박사는 대규모 설비 투자를 감당할 여력이 없는 대만의 경제구조를 고려했을 때 파운드리 사업이 매우 유망하다고 판단했다. TSMC를 설립하고 CEO를 맡으며 파운드리 사업에 전념해오길 약 30년, 2020년부터 반도체가 국제정치적 이슈로 부각되며 TSMC는 글로벌 업체들 사이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먼저 주문을 받고, 그 후 생산을 진행한다는 파운드리의 특성상 재고가 쌓일 일이 없기 때문에 가격 하락의 악순환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특히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2020년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전 세계 경제산업이 큰 영향을 받으며 원자재 가격은 상승하고 수요는 줄어드는 가운데 재고 처리 문제야말로 모든 산업의 골칫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만은 TSMC를 비롯해 UMC, PSMC, VIC 등 세계 굴지의 파운드리 기업을 여럿 보유하고 있다. 또 노바텍, 리얼텍, 하이맥스 등 굵직한 팹리스 기업도 다수 보유하고 있는 만큼, 시스템 반도체의 설계와 생산력을 꽉 쥐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시스템 반도체 시장이 점점 더 커져가고 있는 현 시점에 명실공히 글로벌 시장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트렌드포스의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기준 파운드리 매출 랭킹 10위 안에는 대만 업체가 4개나 포함되어 있었고 이 기업들의 점유율을 모두 합치면 과반이 훌쩍 넘는 65.8%에 이른다. 또 2021년 3분기 기준 팹리스 10위권 기업에 대만 기업 3개가 포함되기도 했다. 당시 1위를 차지한 퀄컴을 포함한 나머지 7개 기업은 모두 미국 국적이다.

모리스 창 TSMC CEO. (사진=TSMC)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했다. 대만은 작년 3, 4분기 세계 반도체 시장의 1위를 탈환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반도체 산업을 장악할 태세다. 지난 7일, 대만은 일명 '대만판 반도체법'으로 통하는 산업 혁신 조례 수정안을 시행해 반도체 산업을 지원 사격하겠다고 밝혔다. R&D 투자비용의 25%, 첨단 설비투자비 5%를 세액 공제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대만판 반도체법은 대만 역사상 가장 높은 구준의 R&D 혜택이다.

대만 행정원은 6대 핵심 국가 전략 중 하나를 '2030년 1나노 공정 진입'으로 명시하고 있다. TSMC가 3나노 양산을 지난해 말 시작했고 2나노 양산을 2025년까지 양산하겠다고 밝힌 것에 더해 국가 차원에서 2030년까지 1나노 공정에 진입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이다. 대만과 TSMC는 사실상 '원 팀'으로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대만 정부는 TSMC의 1나노 공장 건설 예정지로 알려진 타오위안 룽탄 과학단지의 전력과 공업용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발전소와 재생수 공장도 신·증설하고 있다. 
또 2나노 공장이 들어서는 타이중시와의 토지 매입에 대해서도 국가가 발 벗고 나서 부지 조성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영기업들도 앞다퉈 TSMC의 2나노 공장 운영에 나서고 있다. 대만전력은 지난해 8월 TSMC의 2나노 공장 운영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고압발전소를 추가로 짓겠다고 발표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TSMC라는 하나의 기업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대만 전체와 싸우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반도체 전쟁사'의 주인공던 미국 "주도권 찾겠다"...'칩4 동맹' 제안

삼성과 TSMC가 3나노와 2나노를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을 하고 있는 가운데, 언제나 반도체 전쟁의 주인공이었던 미국이라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경기침체 우려가 커져갔던 지난해, 미국은 2월 '경쟁법'을 가결하며 미국 내 반도체 연구 지원 및 생산 보조에 520억 달러를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공급망 안정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450억 달러를 투입하고 국가공급망 데이터베이스를 구성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1년 백악관에서 진행한 반도체 영상회의에서 "이것이 21세기의 인프라스트럭처"라며 반도체 재료인 실리콘 웨이퍼를 들어올리고 있다.

지난해 8월에는 자국 내 반도체 생산라인을 설립할 시 25%의 세제 혜택을 제공하겠다는 내용을 포함시킨 '칩스법'도 공포했다. 미국 내에서도 정당 간 갈등으로 법안 통과가 지연되고 있는 가운데, 더 늦다간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기게 될 거라는 불안감에 급한 반도체 조항만 떼서 먼저 합의하기로 한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메이드 인 아메리카' 정책을 펼치고 있다. 모든 고부가가치 상품을 미국 안에서 만들겠다는 이 정책은 전기차, 반도체, 바이오 등 최근 '잘 나가는' 제품들의 주도권을 미국이 되찾아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지난해 8월 칩스법에 서명한 것도 바이든 대통령의 '메이드 인 아메리카' 정책의 일환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한국, 대만 등 다른 국가들이 지닌 기술을 무시하고 '미국의 반도체 기술'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 산업의 역사에서 큰 줄기를 담당해온 한국과 일본, 대만을 상대로 반도체 공급망 동맹을 통해 각자가 지니고 있는 반도체 산업에서의 특장점을 살릴 것을 제안했다. 일명 '칩4 동맹'은 현재 반도체 점유율이 가장 높은 네 나라가 한데 모인다는 점에서 산업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되어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한국은 아직 동맹 참여를 결정하지 않았지만, 올해 초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반도체를 국가전략산업으로 삼고 대대적인 지원을 강조했으며 국가 간 연대와 협력을 통한 글로벌 공급망 재건이 절실하다고 발표했다. 중국과의 대외관계가 있는 만큼 섣불리 결정할 수는 없지만, 전 세계가 반도체 산업에 사활을 기울이고 있는 지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칩4 동맹은 우리나라에 반도체 산업에 큰 역량을 더해줄 것이 분명하다.

지난달 23일에는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중국과 상호 소통 중"이라고 밝힌 것도 칩4 동맹의 참여를 정부가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 장권은 "한국과 대만, 미국, 일본 등 반도체에 강점이 있어 모이면 시너지가 나는 나라들이 반도체 인력 육성이나 기술 개발, 정보 교류를 해나가면, 반도체 세계 공급망이 강화된다는 면에서 중국도 이해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비즈트리뷴=하영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