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코리아뉴스 / 이순호] 값싼 원료의약품과 복제약 생산기지로 출발한 중국이 2030년까지 전 세계 '퍼스트 인 클래스(FIC·계열 내 최초)' 신약 4개 가운데 1개를 자국에서 개발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신약 개발 건수를 늘리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표적과 기전을 처음으로 개척하는 '원천 신약 강국'으로 올라서겠다는 구상이다. 중국 현지 언론들은 이번 계획을 바이오의약품 산업의 질적 전환을 선언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중국 공업정보화부와 국가발전개혁위원회, 국가약품감독관리국 등 10개 정부 부처는 18일 이런 내용을 담은 '제15차 5개년 제약산업 발전 계획'을 공동 발표했다.
계획의 적용 기간은 2026~2030년이다. 중국 정부는 이 기간 바이오의약품 연구개발(R&D)과 응용 분야에서 세계 선두권에 진입하고 핵심 기술에서 체계적인 돌파구를 마련해 바이오의약품 산업을 국가의 새로운 핵심 산업으로 육성한다는 방침이다.
중국 산시사범대학 실험실. 중국 정부는 2030년까지 전 세계 퍼스트 인 클래스(FIC) 신약의 25%를 자국에서 개발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사진=WFan,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구체적인 목표는 상당히 공격적이다.
중국 정부는 2030년까지 중국에서 개발한 FIC 신약이 전 세계 FIC 신약의 25% 이상을 차지하도록 할 계획이다. 혁신신약 산업은 연평균 20% 이상 성장시키고, 중국 제약기업의 전체 영업수익은 3조 5000억 위안 이상으로 확대한다.
세계 시장에서 연간 10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이른바 '블록버스터' 의약품도 최소 5개 확보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연간 매출 100억 위안 이상 제약기업은 50개, 생산 규모 1000억 위안 이상 제약산업단지는 20개까지 늘릴 계획이다.
상장 제약기업의 매출 대비 R&D 투자 비중은 연평균 10% 이상으로 끌어올린다. 최초 임상시험에 진입하는 신약 파이프라인과 출시되는 혁신신약 수도 세계 최상위권을 목표로 잡았다.
중국 정부는 특히 신약 개발의 방향을 '최초성'과 '혁신성'에 맞췄다. 새로운 표적과 기전, 새로운 약물 유형을 기반으로 한 FIC와 동급 최고 수준의 '베스트 인 클래스(BIC)' 개발을 적극 지원할 방침이다.
중국 정부의 이 같은 목표는 단순한 장기 청사진만은 아니다.
한국바이오협회 바이오경제연구센터가 중국 측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25년 말 현재 중국에서 개발 중인 혁신신약은 4751개로 전 세계 파이프라인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개발 중인 의약품 수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올해 상반기 중국에서 승인된 혁신신약 38개 가운데 31개도 중국 자체 개발 제품이었다.
中 언론 "추격 아닌 원천 혁신으로 돌파"
중국 현지 언론들은 이번 계획에서 단순한 산업 규모 확대보다 중국 제약산업이 '추격형 혁신'에서 '원천 혁신'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관영 신화통신은 이번 계획을 중국 바이오의약품 산업이 세계 혁신의 선두권으로 진입하고 국가의 새로운 핵심 산업으로 성장하기 위한 중장기 전략으로 소개했다. 특히 중국이 원료의약품 공급처와 거대 소비시장이라는 기존 역할에서 벗어나 혁신신약을 세계 시장에 공급하는 단계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경제매체 제일재경(第一财经)은 이날 '중국 혁신신약의 5년: 최소 5개의 블록버스터, FIC는 세계의 4분의 1'이라는 제목의 분석기사를 통해 이번 계획을 집중 조명했다.
제일재경은 중국이 앞으로 5년간 '원천 혁신을 지향하는 바이오의약품 전주기 지원체계'를 구축해 글로벌 제약 혁신 네트워크에 더욱 깊숙이 진입하려 한다고 분석했다.
다만 중국 신약산업의 약점도 함께 짚었다. 중국 국무원발전연구센터 관계자를 인용해 새로운 표적과 새로운 작용기전을 가진 글로벌 최초 신약은 아직 부족하고, 상당수 개발 프로젝트가 후속·개량형 혁신에 집중돼 파이프라인 동질화 문제가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 바이오기업 아케소(Akeso) 창업자도 지난 10년간 중국 제약산업이 글로벌 시장의 '추격자'에서 '동반 경쟁자'로 올라섰지만, 선도 표적의 독창성과 동질화 경쟁 문제는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라고 평가했다. 제일재경은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번 계획에서 '원천 혁신 역량 강화'가 주요 과제의 첫머리에 배치됐다고 전했다.
21세기경제보도(21世纪经济报道)는 아예 이번 계획을 '원천 혁신으로의 돌파(原创突围)'라는 표현으로 규정했다.
이 매체는 중국 정부가 FIC 비중 25%라는 수치뿐 아니라 신약 연구개발을 '최초성·돌파성·파괴적 혁신'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한 데 주목했다. 신약의 숫자를 늘리는 데서 벗어나 새로운 표적과 기전 자체를 중국이 먼저 만들어내겠다는 전략이라는 의미다.
증권시보(证券时报)는 중국 정부가 FIC와 BIC를 동시에 육성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새로운 표적·기전·약물 유형을 가진 신약뿐 아니라 ADC(항체약물접합체), 세포·유전자치료제 등 첨단 분야를 집중 육성하고, 산업·과학기술·규제·의료·보험·금융 정책까지 연계해 이를 지원한다는 것이다.
과창판일보(科创板日报)는 인공지능(AI)에 초점을 맞췄다.
이 매체는 혁신신약 산업의 연평균 성장률 20% 목표와 함께 AI가 중국 제약산업의 성장을 가속할 핵심 수단으로 제시됐다고 분석했다.
중국 정부는 AI를 비롯해 양자컴퓨팅, 슈퍼컴퓨팅, 계산의학 등을 신약 연구개발에 적용하고, 유전자편집과 세포 프로그래밍, 오가노이드, 범용 세포치료제 등 첨단 기술까지 전략적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현지 언론의 보도를 종합하면 중국이 이번 계획에서 강조하는 것은 단순한 '신약 대국'이 아니다. 개발 파이프라인과 허가 건수에서 이미 확보한 양적 우위를 새로운 표적과 기전을 먼저 만들어내는 질적 우위로 전환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올해 신약 기술수출 1200억 달러 돌파
중국 정부가 '세계 FIC 25%'라는 공격적인 목표를 제시한 배경에는 최근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중국 신약의 해외 기술수출이 자리하고 있다.
중국 국가약품감독관리국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들어 중국에서 59개의 혁신신약이 허가됐으며, 이 가운데 새로운 기전이나 표적을 가진 FIC는 13개였다.
중국 혁신신약의 해외 기술수출 계약 총액도 1200억 달러를 넘어 전년 대비 36% 증가했다. 계약금만 100억 달러를 넘었으며, 개별 거래의 평균 규모와 계약금 비중도 높아지고 있다.
중국 장쑤성 쑤저우에 위치한 이노벤트 바이오로직스(Innovent Biologics) 사업장. 이노벤트는 항암제와 면역질환 치료제 등을 개발하는 중국 바이오제약기업이다. [사진=Shwangtianyuan,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글로벌 제약사들의 중국 신약 도입도 이어지고 있다.
로슈(Roche)는 올해 1월 중국 메디링크 테라퓨틱스(MediLink Therapeutics)가 개발한 B7-H3 표적 항체약물접합체(ADC) '탐보타투그 펠리테칸(Tam-Peli·YL201)'의 중국 본토·홍콩·마카오를 제외한 글로벌 권리를 확보했다.
메디링크가 받는 계약금과 단기 마일스톤만 5억 7000만 달러다. 추가 개발·허가·상업화 마일스톤과 매출에 따른 로열티도 별도로 지급된다.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역시 최근 중국 바이오기업의 항암 후보물질을 도입하는 등 글로벌 제약사들의 중국 신약 '쇼핑'은 계속되고 있다.
중국은 그동안 막대한 환자와 임상 인프라, 빠른 임상시험을 바탕으로 글로벌 신약개발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워왔다. 그러나 이번 5개년 계획은 경쟁의 무게중심을 개발 속도와 규모에서 새로운 표적·기전과 FIC 창출로 옮기겠다는 의지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낸다.
한국 제약·바이오 업계 입장에서도 중국을 단순한 거대 시장이나 저비용 개발 경쟁국으로 바라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이미 전 세계 신약 파이프라인의 약 3분의 1을 보유한 중국이 앞으로 5년간 '원천 혁신'까지 국가 전략으로 밀어붙이면서 글로벌 기술수출과 신약개발 시장에서 한·중 기업 간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