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7일(현지시간) 미국 샌디에이고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미국암연구학회 2026 연례학술대회(AACR 2026)' 개막 세션. 이번 학회에는 전 세계 2만 2000명 이상의 암 연구자와 바이오 업계 관계자가 집결하며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사진=미국암연구학회)[헬스코리아뉴스 / 서정필]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암종을 구분하는 절대적 기준은 '발생 부위'였다. 폐에 생긴 종양과 대장에 생긴 종양은 태생부터 다른 질환으로 간주됐으며, 장기별 치료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의료계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암 치료 지형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암이 발생한 '공간'이 아닌, 암을 일으킨 '원인'에 집중해 치료의 시작점을 설정하는 흐름이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같은 부위에 발생한 암이라도 암 성장을 주도하는 이른바 '드라이버 변이(Driver mutation)'가 무엇이냐에 따라 치료 전략 자체가 크게 달라지는 것이다. 지난 17일 개막한 미국암연구학회 2026 연례학술대회(AACR 2026)에서도 이러한 기류는 뚜렷하게 감지됐다. 이는 암 치료의 중심축이 장기(Organ)에서 유전자(Gene)로 상당 부분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어느 장기인가'에서 '어떤 기전인가'로
이번 학회의 핵심인 플레너리 세션(Plenary Session) 발표 주제들을 살펴보면, 특정 장기에 국한된 신약이라는 개념은 점차 희박해지고 있다. 치료제 개발의 핵심 지표가 발생 부위라는 공간적 개념보다 '어떤 변이를 타깃으로 삼는가'라는 기전적 문제로 수렴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레볼루션 메디신(Revolution Medicines)'이 이번 학회에서 공개한 RAS 타깃 비소세포폐암 신약들이다. RAS 유전자는 세포 증식 신호를 조절하는 스위치 역할을 하는데, 여기에 결함이 생기면 암세포는 제어 불능의 상태로 폭주한다. 레볼루션 메디신이 개발 중인 '졸돈라시브(Zoldonrasib, 코드명 RMC-9805)'와 '엘리론라십(Elironrasib, 코드명 RMC-6291)'은 각각 RAS 변이 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G12D(아스파르트산 변이)와 G12C(시스테인 변이)를 선택적으로 정밀 타격하는 기전을 가진다.
흥미로운 점은 이 약물들이 같은 비소세포폐암 치료제임에도 불구하고, 유한양행의 '렉라자(Leclaza, 성분명 : 레이저티닙·Lazertinib)' 등 기존 치료제의 입지와는 직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렉라자'가 암세포 표면의 EGFR(상피세포 성장인자 수용체) 변이를 차단한다면, 레볼루션 메디신의 약물들은 그 하위 단계인 RAS 유전자 자체의 결함을 공략한다. 즉, 같은 장기에서 발생한 암일지라도 환자가 보유한 유전자 변이의 양상에 따라 치료의 길목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셈이다.
25년 정밀의학 데이터가 만든 지도의 재편
이러한 변화는 지난 4반세기 동안 정밀의학이 축적해온 방대한 데이터의 결실이다. 1990년대 후반 유방암 치료제 '허셉틴(Herceptin, 성분명 : 트라스투주맙·Trastuzumab)'이 유전자 변이 타깃의 포문을 열었다면, 2010년대 초반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NGS) 기술의 보급은 데이터 확보의 문턱을 획기적으로 낮추며 암의 세분화에 속도를 붙였다.
NGS는 수많은 유전자 조각을 동시에 해독해 환자 고유의 암 유전자 지도를 그려내는 기술로, 단일 유전자를 순차적으로 확인하던 과거의 한계를 넘어 정밀 의료를 구현하는 실질적인 동력이 됐다. 이어 2017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특정 유전자 변이 기반의 항암제 '키트루다(Keytruda, 성분명 : 펨브롤리주맙·Pembrolizumab)'를 승인하며 '암종 불문 치료제(Tumor-agnostic therapy)' 시대가 열렸다. 최근에는 '엔허투(Enhertu, 성분명 : 트라스투주맙 데룩스테칸·Trastuzumab Deruxtecan)'가 HER2 양성 고형암 전체로 적응증을 확장하며 발생 부위에 상관없는 유전자 변이 맞춤형 치료 시대를 활짝 열었다.
'암종 불문 치료제'의 보편화와 신인류 항암제의 등장
'AACR 2026'의 세션 구성은 이러한 흐름을 더욱 명확히 보여준다. 특정 유전자 변이를 정밀 타격한 임상 결과들이 학회의 메인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밀종양학의 새로운 지평(New Frontiers in Precision Oncology)' 세션에서 '디쓰리바이오(D3 Bio)'의 KRAS G12C 억제제 '엘리스라십(Elisrasib, 코드명 D3S-001)'의 임상 결과를 발표한 조병철 연세암병원 교수는 "특정 변이를 선택적으로 억제하는 기전이 차세대 항암제의 실질적인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 현지 언론 역시 '엘리스라십'을 폐암 신약이라는 좁은 틀 대신 '변이별 선택적 억제제(Mutation-specific inhibitor)'라고 정의했을 정도다.
독일 '베링거인겔하임(Boehringer Ingelheim)'이 공개한 '존거티닙(Zongertinib, 코드명 BI 1810631)' 또한 HER2(인간 상피세포 성장인자 수용체 2형) 변이 비소세포폐암에서 새로운 표준 치료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HER2가 모든 암종을 관통하는 공통 지표(Pan-cancer marker)임을 재확인시켰다.
유전적 결함으로 재정의되는 암의 본질
변이별 맞춤형 치료제가 쏟아지는 배경에는 NGS 비용의 하락, AI를 활용한 단백질 구조 예측 기술의 발전, 그리고 규제 기관의 유연한 제도적 뒷받침이 있다.
이제 항암제 개발의 화두는 "어떤 장기의 암을 잡느냐"가 아니라 "어떤 유전자 변이를 선점하느냐"로 바뀌었다. 암이라는 질병은 더 이상 장기별로 독립된 질환이 아니라, 유전적 결함에 따른 공통의 작용 기전으로 묶이는 '유전적 질환'으로 그 본질이 재정의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