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부 [헬스코리아뉴스 / 임도이 기자] 정부가 건강보험 재정 안정을 위해 국내 제약업계의 핵심 수익원인 제네릭(복제약) 가격을 14년 만에 대폭 인하한다. 대신 희귀질환 신약의 등재 기간을 절반 이하로 단축하고 혁신 제약사에 대한 보상을 강화하는 '선택과 집중' 전략을 택했다.
보건복지부는 26일 제6차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국민건강보험 약가제도 개선방안'을 최종 심의·의결했다. 이번 개편은 2012년 약가 일괄 인하 이후 가장 강력한 수준의 조정으로 평가받으며, 향후 10년간 국내 제약산업의 지형도를 완전히 바꿀 것으로 보인다.
# 제네릭 산정률 45%로 하향 ... 2036년까지 '단계적 인하'
이번 개편의 핵심은 현재 오리지널 약가의 53.55%인 제네릭 산정률을 45%로 낮추는 것이다. 정부가 제네릭 가격에 직접적으로 손을 댄 것은 한국의 복제약 가격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대비 2.17배나 높다는 판단 때문이다. 건강보험의 약가 지출이 매년 1조~2조 원씩 급증하는 상황에서 제네릭 중심의 지출 구조를 손보지 않고서는 건보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논리다.
다만 업계의 충격을 고려해 '일시 인하' 대신 '단계적 인하'라는 완충 장치를 뒀다. 2012년 이전에 등재된 약제(약 1만 2000여 개)는 올해 하반기부터 6년에 걸쳐 인하하고 2013년 이후 등재된 약제는 2030년부터 2036년까지 인하를 완료한다.
결과적으로 2036년이 되면 국내 대부분의 제네릭 가격은 오리지널 대비 45% 수준으로 하향 평준화된다. 정부는 '제네릭 난립'을 막기 위해 계단식 약가 인하 기준도 강화했다. 기존에는 20번째 등재 품목부터 가격을 깎았으나, 앞으로는 13번째 품목부터 직전 최저가의 15%씩 가격이 내려간다.
# '혁신형' 문턱 높이고 외자사 유형 신설 ... 3년 유예 기간 부여
정부는 단순히 가격을 깎는 데 그치지 않고, 연구개발(R&D)에 집중하는 기업에는 확실한 인센티브를 주기로 했다. 다만 '혁신형 제약기업'의 인증 기준은 한층 까다로워진다.
개정안에 따르면 의약품 매출액 대비 R&D 비중 기준이 일괄적으로 2%p씩 상향된다. 매출 1000억 원 이상 기업은 기존 5%에서 7%로, 1000억 원 미만 기업은 7%에서 9%로 높아진다. cGMP나 EU GMP를 보유한 기업 역시 기존 3%에서 5%로 기준이 올라간다. 다만 기업들의 준비 기간을 고려해 시행일로부터 3년간 적용을 유예하기로 했다.
또한 외국계 혁신형 제약기업 유형을 신설해 다국적 제약사의 특성을 고려한 인증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국내 연구 시설 유치와 공동 연구를 장려하기 위한 조치다. 혁신형 제약사는 신규 제네릭 약가를 49%로 인정하며 국내 생산 시 최대 4년간 유지해 준다. 준혁신형 제약사는 약가 47%를 적용하며 최대 3년간 특례를 부여한다. 이는 제네릭으로 번 돈을 영업이익으로만 남기지 말고 신약 개발에 더 공격적으로 재투자하라는 신호로 풀이된다.
의약품 매출액 대비 의약품 연구개발비 비중 개정안<혁신적 가치 창출 약가우대 방안>
비고
As-Is
➡
To-Be
우대 수준
혁신형 제약 : 68%
➀혁신형 제약 : 60%
➁혁신형 제약 준하는 기업 : 50%
기간
1+2+2년 (통상 1년)
1 + 3년
연장 요건
대상 성분 3개사 이하 공급 시
대상 제네릭 국내 생산 시
대상 기업 수
48개
약 60여개 내외
# 희귀질환 신약 등재 240일 → 100일 ... 환자 보장성 강화
환자들에게는 반가운 소식도 포함됐다. 중증·희귀질환 치료제의 건강보험 급여 등재 기간이 현재 최대 240일에서 100일 이내로 획기적으로 줄어드는 '신속 등재' 시스템이 도입된다.
건보공단과 제약사 간의 별도 계약을 통해 신약을 빠르게 등재하는 '약가유연계약제' 적용 대상도 대폭 확대된다. 신약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해 줄 수 있는 비용효과성 평가(ICER) 임계값 상향도 추진되어, 혁신 신약이 제값을 받고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이와 관련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27일 논평을 통해 "그동안 항암제는 평균 1년 10개월, 희귀질환 치료제는 2년 이상 급여 등재가 지연되면서 환자들이 적기 치료를 놓치는 고통을 겪어왔다"며 "이번에 도입되는 '신속등재-후평가' 모델은 환자의 치료 접근성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환영했다. 연합회는 그러면서 제네릭 약가 조정으로 절감된 재정이 실제 환자 치료 환경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세밀한 운영을 당부했다.
# 필수의약품 '10년 보장' ... 수급 불안정 정조준
최근 잦아진 의약품 품절 사태를 막기 위한 대책도 마련됐다. 원료를 직접 생산하거나 국산 원료를 사용하는 국가필수의약품, 소아용 의약품 등은 약가를 68%까지 우대해 주고, 이 가격을 최소 10년(5+5+α)간 보장한다.
특히 퇴장방지의약품 공급 비중이 높은 기업을 '수급안정 선도기업'으로 지정해 별도의 약가 우대 트랙을 제공하는 등 필수의약품 공급망 유지에 헌신하는 기업에 대한 보상을 현실화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이번 개편은 우리 약가 제도를 주요국 수준으로 선진화하고 제약산업이 R&D 중심으로 체질을 개선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라며 "올해 하반기부터 관련 고시 개정을 통해 단계적 조정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퇴장방지의약품·국가필수의약품 정의>
퇴장방지의약품(복지부)
국가필수의약품(식약처)
환자의 진료에 반드시 필요하나 경제성이 없는 약제로서 생산 또는 수입 원가의 보전이 필요한 약제 ⇨ '품목' 단위 지정
질병 관리, 방사능 방재 등 보건의료상 필수적이나 시장기능만으로는 안정적 공급 어려운 의약품 ⇨ '성분' 단위 지정
<수급안정 선도기업 우대>
▸(대상) '수급안정 선도기업'으로 선정된 제약사가 신규 등재하는 제네릭
▸(기업 요건) ➀제약사 생산 품목 수 中 퇴장방지의약품 비중 or ➁제약사 청구 금액 中 퇴장방지의약품 비중이 20% 이상인 제약사
▸(우대 수준) 가산 약가 50%, 1 + 3년*
* (+3년 요건) 신규 등재한 제네릭 의약품을 국내 생산 시
# 제약산업 비대위 "16% 인하 가혹 ... 산업 생태계 훼손 우려"
하지만 국내 제약업계의 반응은 싸늘하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를 포함한 7개 단체로 구성된 '산업발전을 위한 약가제도 개편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는 27일 입장문을 내고 이번 개편안에 대해 강력한 유감을 표명했다.
비대위는 "산업계는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최대 10%까지의 약가 인하는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으나, 이를 상회하는 16% 인하(산정률 45% 하향)가 결정된 것은 현실적 한계를 넘어선 것"이라며 "대규모 약가 인하는 국내 기업들의 생존을 어렵게 하고 R&D 투자 등 혁신 동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다수의 제약기업이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하며 설비 투자 축소와 채용계획 재조정 등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대위는 정부에 향후 민관협의체를 통해 실질적인 보완 대책을 마련해 줄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 외자사 협회 "치료 접근성 개선의 의미 있는 진전" 환영
국내 업계의 반발과 달리 다국적 제약사들을 대변하는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KRPIA)는 이번 개편안을 환영하고 나섰다. KRPIA는 27일 입장문을 통해 "이번 개편안은 혁신 신약의 가치를 보상하고 환자의 치료 접근성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담은 의미 있는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KRPIA는 특히 신속등재 제도와 경제성평가 ICER 임계값 상향 등이 반영된 점을 긍정적으로 보고, 한국의 낮은 신약 급여율(22%)이 G20(28%)과 OECD(29%) 등 글로벌 수준으로 개선되는 토대가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국내사와 외자사 간의 극명한 온도 차가 드러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