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 의과대학 홍승봉 명예교수[헬스코리아뉴스 / 홍승봉] 항경련제(antiseizure medication, ASM)는 뇌전증 환자의 생명을 지키는 약물이다. 이 약물들은 적정 혈중 농도 범위(치료역, therapeutic window)가 좁고, 환자마다 약동학적 반응이 다르다. 일정한 혈중 농도를 유지하는 것이 치료 효과와 안전성 확보에 결정적이다. 따라서 동일 성분이라 하더라도 제조사나 제형이 바뀌면 혈중 농도에 영향을 미쳐 발작 재발이나 부작용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
생물학적 동등성의 한계와 실제 임상적 위험
신약의 특허가 만료되면 여러 제약사가 복제약(제네릭)을 생산한다. 제네릭 의약품은 오리지널 의약품과의 생물학적 동등성(bioequivalence)을 입증해야 판매가 허가된다.
동등성 시험 기준은 혈중 약물 농도의 최고 농도(Cmax)와 시간-농도 곡선하 면적(AUC)에 대한 90% 신뢰구간이 80~125% 범위 내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 기준은 통계적 평균에 기반한 값으로 실제 임상에서는 환자 개별의 약동학적 차이가 훨씬 더 클 수 있다.
예컨대, 오리지널 약 대비 제네릭 B의 혈중 농도가 80%이고, 제네릭 C는 125%라면, 두 제네릭 간 대체조세 시 최대 45%의 혈중 농도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항경련제의 혈중 농도가 5%만 낮아져도 발작이 재발하고, 5% 이상 증가하면 어지러움, 복시, 졸림, 인지기능 저하, 보행 장애 등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전신강직간대발작(generalized tonic-clonic seizure)이 년 1-3회 재발할 경우 뇌전증 돌연사(SUDEP) 위험은 3-15배 증가한다. 즉, 항경련제 혈중 농도의 미세한 변화는 뇌전증 환자의 생명 및 신체손상과 직결된다. 2016년 항경련제 153개 대체 조제 연구논문들을 분석한 결과 약물 치료 실패, 부작용 발생 및 발작 악화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항경련제 대체 조제 (오리지날→제니릭, 제니릭→다른 제네릭)를 피하라고 결론지었다.

임상 현장에서의 한계, 종합병원 처방 코드 제한이 더 큰 문제
삼성서울병원 재직 당시, 필자는 다른 병원에서 먹던 제네릭 항경련제가 병원 처방코드에 없어서 다른 회사 약으로 대체 처방했다가 발작이 재발한 사례를 여러 차례 경험했다. 약제부에 값이 저렴한 제네릭 약의 처방 코드를 원외(병원 약제부 인력의 부담이 없음)로 추가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병원 외부 약국의 부담이 커진다"는 이상한 이유를 대면서 거부했다. 환자의 안전과 치료는 도외시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이와 같이 일부 상급종합병원은 동일 성분의 제네릭 약이라도 1~2개 제품만 처방코드로 등록한다. 의사가 보다 비용 효율적인 약을 사용하고 싶어도 약제부의 승인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러한 체계는 의사의 치료 자율성과 환자의 선택권을 침해하며, 결과적으로 보험재정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2019년 국정감사에서 신상진 의원은 "병원의 제네릭 처방 코드 제한이 제약산업 발전과 건보재정에 악영향을 준다"고 지적했고 이에 보건복지부 장관은 조사하겠다고 답했으나 아직까지 실질적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최근 의약품 공급 불안정을 이유로 성분명 처방 제도가 논의되는 것 같다. 그러나 항경련제는 단순한 대체조제가 불가능한 약물군이다. 더욱이 일부 약이 품절되었을 때에는 이미 의사들이 약국의 대체 조제를 승인하고 있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약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1, 2, 3세대 항경련제 종류영국 의약품규제청(MHRA)은 항경련제를 3개 범주로 분류한다. 카바마제핀, 페니토인, 페노바르비탈, 프리미돈 등은 항상 동일 제조사로 유지하고, 라모트리진, 발프로산, 토피라메이트 등은 환자 상태에 따라서 개별 판단한다. 이밖에 레비티라세탐, 가바펜틴, 프레가발린 등은 교체 가능하지만 외형·포장 변화 시 혼동 주의를 권고면서 약물 선택을 의사가 결정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미국뇌전증학회(AES) 역시 제네릭 간 교체가 대체로 안전하다고 인정하면서도, 변경 시 환자 고지 및 약물농도 모니터링의 필요성을 명시하고 있으며 환자가 원할 때에는 제품명으로 처방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은 10개 이상의 서로 다른 의료보험 체제이므로 다른 나라와 상황이 많이 다르다.
이처럼 선진국의 가이드라인은 "무조건 성분명 처방"이 아니고 환자의 치료와 안전을 더 우선시 하고 있다. 홍콩은 현재 한국과 같이 제품명 처방을 하고 있는데 홍콩 일부 병원에서 항우울제를 일방적으로 같은 성분명의 다른 제품으로 변경할 때 우울증 증상의 악화를 자주 경험한다고 한다.
따라서, 성분명 처방은 환자에게 많은 위험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반대한다. 오히려 종합병원들이 약 처방 코드를 1-2개 약으로 제한하는 것부터 개선하여 의사가 처음 약을 처방할 때 오리지날, 제네릭 약들 중 선택의 폭을 넓혀서 평균 약값이 떨어지는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의사의 약물 처방 관행도 개선되어야
정부의 정책적 목표가 '의약품비 절감'이라면, 일부 의사들의 과잉 처방을 개선하는 것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고혈압, 당뇨병, 두통, 불면증 약과 함께 자동으로 위장약이 함께 처방되는 관행은 개선되어야 한다. 항생제, 항히스타민제, 혈액 개선제, 간 보호제, 영양제 등의 처방도 줄이고, 실제 질환과 관계없는 약 처방은 지양해야 한다. 대한의사협회는 자율적으로 약을 적게 처방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약처방에 대하여 더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진정한 약가 절감은 환자 안전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이뤄져야 한다.
뇌전증 환자의 생명선은 '일관된 약물 복용'
뇌전증 환자는 매일 발작의 위험 속에서 살아간다. 하루 약을 빠뜨리거나, 제조사가 바뀌는 것만으로도 재발 위험이 커질 수 있다. 실제로 수년 동안 발작 증상이 없었는데 단 한번 항경련제를 복용하지 않아서 전신강직간대발작이 발생하여 골절, 두부외상, 화상 또는 사망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운전을 못하게 되고, 직장에서 해고당한다. 대체조제로 혈중 농도 변화 시 발생하는 뇌전증 발작의 악화는 엉청한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정부, 병원, 제약사, 약국 모두 환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 항경련제의 성분명 처방은 절대로 안 된다. 약물 변경은 반드시 의사의 판단과 환자의 동의하에 이뤄져야 하며, 동일 제제의 안정적 공급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우선 마련되어야 한다. 항경련제의 무분별한 대체조제는 단순한 제도 문제가 아니라, 환자의 생명과 직결된 의료 안전의 문제다.
※ 편집자 주) 본 기사는 성균관대 의과대학 신경과 명예교수이자 뇌전증지원센터장인 홍승봉 교수가 직적 작성한 것입니다.